파랑주(酒)

가을이다. 봄꽃을 보며 난생 처음 꽃을 본 사람처럼 호들갑을 떨고, 자람새가 빠르고 색이 강렬한 여름꽃에 매료되어 내 역량을 넘어서는 많은 양의 꽃차를 만들다가, 어느 날 가을이다. 문득 그렇게 깨닿는다. 날짜로가 아니라 후각으로 먼저 알게된다. 내 앞에 놓인 꽃 향의 결이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어느 누가 산국의 향을 앞에 두고 여름꽃에 연연할 수 있을까? 사람의 입맛 또한 어제와 오늘이 달라 갑자기 쌉싸름하고 약이 될 것 같은 ‘으른스러운’ 맛을 찾게 된다. 여름 꽃을 제대로 즐겨보지도 못하고 어느 틈에 가을 꽃을 붙들고 있다. 결국 맛도 제대로 보지 못한 여름꽃차를 놔두고 가을꽃차를 만들고 있으니 기어이 소비와 생산의 엇박자를 내고야마는 지경에 이른다.

이번 여름꽃차에는 유난히 파랑색 계열이 많았다. 아마도 색으로나마 무더위를 잊고 싶었던 마음 때문이었으리라. 그 중 당아욱꽃(Blue mallow flower)과 나비완두콩꽃(Butterfly pea flower)을 내어 술을 담기로 했다. 이렇게라도 해야 여름의 한줌이라도 오래 저장할 수 있을 것 같다. 또 언젠가 이 파랑색 꽃술에 녹아든 안토시아닌(Anthocyanin)이라는 항산화 성분은 술 마실 좋은 구실이 될 것이다.

뚜껑을 열어 꽃차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직 습이 들지 않아 파삭파삭 신선한 상태이다.

당아욱꽃차
나비완두콩꽃차

당아욱꽃과 나비완두콩꽃의 푸른 색은 수용성색소로 레몬즙이나 탄산수 같은 산성 물질을 만나면 붉게 변하는 특성이 있다. 이 꽃들로 만든 나만의 술, ‘파랑주(酒)‘를 개봉하게되면 탄산수를 섞어가며 다양한 스펙트럼의 색들을 만들어 마셔볼 작정이다. 생각만 해도 퍽 재미있을 것 같다. 참고로 나비완두콩꽃은 짧게 ‘나비콩꽃’이라고도 불리는데, 우리나라에선 식품의약품안전처(MFDS)에서 식품으로 만들어 판매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아직 안전성이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데, 미국이나 일본 그리고 태국 등지에서는 이 꽃을 이용해 음료수나 주류로 다양하게 상품화 하고 있어 조금 아쉽다. 어쨌든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허가가 나지 않았으니 나만을 위한 깜짝 파티에만 쓸 것이다.

꽃의 색소가 녹아 내리는 모습
완성된 꽃술의 모습

두 꽃을 섞어 유리 용기에 담고 소주를 조심스럽게 부어보았다.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색소가 녹아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잉크가 퍼지듯 뭉글뭉글 그렇게 파란색이 뿜어져 내려앉는다.

유리 용기 전체를 찍어 색의 변화를 관찰해 보았다. 15분 정도 있으니 이렇게 짙은 쪽빛으로 변했다. 꽃차로 만들 때 꽃잎을 골고루 잘 익힐수록 색소의 용출 속도도 빨라진다. 무더웠던 여름에 힘들게 만들었던 꽃차로, 시원한 가을에는 간단히 꽃술을 만들었다. 왠지 헛헛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나의 여름을 파랑으로 담아 때때로 바라보고 맛볼 수 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Seize the mo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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