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자는 시간 외에는 늘 각성 상태를 유지하느라 만성피로증후군에 시달리는 우리 몸의 파수꾼, 눈. 장기라 하면 뼈, 근육, 피부 그리고 털로 단단히 보호해야 하는 중요하고 연약한 기관들인데, 어찌 사람의 눈은 이렇게 충격이나 자극에 취약한 위치에 자리한 것일까? 쉽게 상할 수 있는 위험을 무릎 쓰고라도 ‘보는’ 행위를 통해 수많은 정보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얻어 찰나를 살아내기 위해 지금의 이런 위치에 눈을 갖게 된 것이리라. 그러나 모든 장기에는 나름의 연식이 있기에 영원히 처음처럼 사용할 수는 없다. 특히 눈은 사용 연한이 상대적으로 더 짧은 것 같다. 언젠가부터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어 확대해야 깨알 같은 글자들을 겨우 해독해 낼 수 있는 지경이니 당혹스럽고 번거롭다. 게다가 요즘 같이 자외선 지수가 높은 여름에는 선글라스를 쓰지 않으면 양산을 들어도 눈이 시려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 걷게 된다. 하나가 아닌 둘이나 되는 나의 눈에 벌써 세월의 흔적이 드리워지고 있는 것일까? 그저 생활 속 작은 불편이라고 하기에는 보는 것에서 얻는 즐거움이 큰 나이기에 시력 감퇴가 막연한 걱정거리가 아니라 현실적인 장애가 됐다.
‘눈’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한다는 생각을 괴고 살다가 마리골드라는 꽃을 알게 됐다. 사실은 오랫동안 ‘금잔화’라는 이름으로 먼저 알고 있었고, 봄의 팬지, 가을의 국화처럼 여름이면 주변 화단에서 흔하게 만나게 되는 밝은 색상의 꽃. 드디어 ‘네가 내게로 와서 꽃’이 된 것이다. 마리골드는 눈 건강에 좋다는 ‘루테인(Lutein) 영양제’의 원료로 쓰이는 꽃으로, 달걀이나 브로콜리보다 훨씬 많은 양의 루테인을 함유하고 있어 기능성이 뛰어난 꽃이다. 사람은 누구나 노화로 인해 불편한 변화를 겪으며 살게 된다. 우리 눈의 안구 속 황반 색소의 밀도도 노화와 함께 차차 감소하다가 50대가 되면 20대 때의 절반으로 줄어든다고 한다. 황반은 물체의 상이 맺히는 곳으로 황반 색소가 감소하면 소위 ‘보는 능력’도 감퇴 되고 심한 경우 실명에 이를 수도 있다. 이때 황반 색소의 밀도를 높여주는 것이 바로 ‘루테인’이라는 성분이다. 반드시 섭취를 통해서만 보충이 되는 성분이라고 하니 나름의 방법을 고민해봐야 했다. 영양제 한 알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왠지 영양제마다 들어 있는 ‘기타 등등’의 물질들이 영 못마땅한 터라 ‘꽃차’를 만들어 내 노화된 안구를 위로하기로 했다.
초여름부터 가을 서리가 내릴 무렵까지 계속 피는 마리골드를 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노랑 주황의 밝고 야무지게 생긴 마리골드(Marigold)는 Mary와 Gold가 합쳐진 말로 ‘성모 마리아의 황금빛 꽃’이다. 서양화에서 표현된 성모의 광배를 떠올리면, 이 꽃이 왜 이런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쉽게 납득된다. 눈 부신 빛이 사방으로 뿜어 나오는 듯한 형상이니 말이다. 마리골드라도 키가 크고 노란색 꽃잎이 풍성한 천수국(African Marigold)과 약간 키가 작고 꽃잎이 평평하며 밝은 주황색이 많아 화단에서 흔히 가꾸는 만수국(French Marigold)이 있다. 그 밖에도 금송화, 홍황초, 금잔화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올해는 마리골드가 피기 시작할 무렵부터 비가 많이 와서인지 이 꽃차 특유의 톡 쏘는 듯한 쌉쌀한 맛과 향이 살짝 누그러져 있다. 그래서 마시기 더욱 편안하다. 확실히 꽃마다 빈티지(?)가 좋은 해가 있는 듯하다. 욕심이 생겨 우리 가족들이 일 년은 두고 마실 수 있는 양, 약 5kg의 꽃으로 마리골드꽃잎차와 통꽃차를 만들어보았다. 1kg은 통꽃차를 위해 4kg은 꽃잎차를 위해 쓰기로 했다. 같은 재료로 만들지만 만드는 시간은 물론 향과 맛이 확연히 다른 꽃차들이다. 예쁜 꽃도 보고 쌉싸름한 맛과 살짝 코끝을 치는 매력적인 향을 지닌 통꽃차도 좋지만, 습도가 높은 요즘에는 꽃잎만을 이용하여 짧은 시간에 차를 만드는 게 좋다. 또한 차로 우릴 때 시간이 절약되고 구수한 맛도 나서 식사와 함께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루테인은 지용성이라 식사와 함께 또는 식사 후에 마시면 효율적인 흡수가 가능할 것이다.
꽃잎이 많기는 해도 무르거나 다칠까 걱정 없이 다듬을 수 있는 마리골드, 네가 참 좋다! 덖어내고 향을 입히는 내내 실내를 가득 채우는 향, 차로 만들어지며 산뜻하게 가벼워진 빛 조각들. 꽃차를 만드는 일은 꽃을 보고, 채취하고, 다듬고, 만들어 내는 전 과정이 향, 색, 촉감의 향연 그 자체이다. 이번 작업은 닷새가 지나서야 마무리됐다. 사실 좀 많은 양이긴 했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와 건강을 나눌 수 있는 풍요를 손에 쥐었으니 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조용히 앉아 한 잎 두 잎 서서히 밝은 빛의 색을 우려내는 마리골드를 바라보며 ‘꽃멍’에 잠긴다.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세상이 창조될 때의 빛과 내가 직접 만들어 낸 꽃 빛. 나의 빛은 따뜻하며 맛있게 마실 수 있다. 게다가 눈에도 좋다.